[여성학자] 나혜석

2009. 5. 19. 10:30 | Posted by 여성학도서관 오호호


 

나혜석(羅蕙錫 : 1896∼1948),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며 여권운동의 선구자 이자
진보적 사회사상가 정월(晶月) 나혜석선생은 수원의 부유한 개명 관료의 딸로 태어나 우리
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최초의 여성 서양화
가이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서울에서는 첫 번째로 개인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유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힘썼고 초창기 「이른 아침」(早朝)과 같은 목판화로 민중의 삶을 표현
했으며, 1922년부터 1932년까지 해외 여행을 떠났을 때를 빼고는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하여 입선과 특선을 한 재주 있는 화가였다. 나혜석은 단지 화가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
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그렇게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살림살
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까지 담은 여러 논설들과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
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 「경희」를 쓴 근대 최초의 여성작가였다.

 나혜석의 생애 연보    

 홈 페이지 참조 - http://www.arthim.com/nahyesuk0.htm

1896
 4월18일(호적상으로는 4월 28일) 경기도 수원에서 나주 나씨 나기정
(羅基貞)과      수성 최씨의 최시의(崔是議)의 5남매( 稽錫, 弘錫, 景錫, 蕙錫,
芝錫 :호적상으     로는 계석을 제외한 4남매)중 넷째로, 딸로서는 둘째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     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지금의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45
번지 일     대)이며, 아버지 나기정은 한일합방 전후 군수를 지낸 개명관료였다.

 
1910(14세)
 6월 수원 삼일여학교(나혜석의 사촌오빠인 나중석이 1920년 수원 보시동 북감리
     교회내에 설립한 사립삼일여학당으로 1909년 삼일여학교로 변경하였다. 나
     혜석은 1910년 신학제에 의한 제1회 졸업생 4명중 한명이었다. 현재의 매향
     여자경영정보고등학교로 바뀜)졸업.
9월 1일 서울에 있는 진명여학교에 진학했다. 두살 아래인 동생 지석도 함께 진
     학하여 자매는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다.

 
1912(16세)
 진명여학교 3학년 때는 7명의 동급생 중 급장이었고 1등을 했다.

 
1913(17세)
 3월 28일 경성 사립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수로 졸업했다.
4월 15일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도쿄 '사립 여자 미술학교' 서양화부 선과  보통과
1학년(4년 과정)에 입학했다.

 
1914(18세)
 여름부터 아버지는 혜석에게 좋은 혼처가 나섰다고 공부를 그만 두고 시집 갈 것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이미근대적 여성 의식에 눈을 떴고 자아 의식을 가지게 된 데다가 오빠 나경석의
 친구인 게이오대학생 최승구(崔承九)와 연애관계에 있었던 혜석으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12월,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학지광」3호에 최초의 글 「이상적 부인」을 발
     표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여성문예동인지 「청탑」을 중심으로 여성해방론과  신여성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나혜석도 그러한 지적 자장 안
     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1915(19세)
 1월, 2학년의 제 3학기인 이해 1월부터 아버지의 결혼 강요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휴학했다. 아버지의 엉뚱한 결혼 권유에 맞서 여주공립보통학교 교원
      으로 1년간 근무하면서 돈을 모았다.
12월 10일 아버지 나기정 사망. 이해 말 최승구는 결핵 병세가 악화되어 조선으
      로 돌아가 전남 고흥 군수로 있던 형 최승칠의 집에서 요양함.
 
1916(20세)
 2월경 전남 고흥으로 죽기 직전의 최승구를 보러감. 도쿄에서 학교 생활을 하다
     가 도중에 잠깐 빠져 나온 것인데나혜석이 방문한 다음날 최승구는 25세로
     죽어 전남 고흥읍 남계리 오리정 공동묘지에 묻혔다.
여름 무렵수원집으로 나경석을 찾아온 김우영을 만났고 이후 오빠의 강력한 권유
      로 서로 도쿄와 교토를 오가며 만남. 중간에 이광수와도 가까워졌으나 오빠
      나경석의 반대로 이광수와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17(21세)
 3월 학지광에 「잡감」을 발표했다. 유학생 모임인 학우회의 망년회에 참석했던
      소감을 쓴 것임. 필명으로정월(晶月,c.w)이란 호를 사용했다.
7월 「학지광」에 「잡감-K언니에게 여함」발표.
7월 도쿄 여자친목회의기관지인 「여자계」창간호에 소설을 발표했을 것으로 추
      측된다.
 
1918(22세)
 3월 「여자계」2호에 단편 소설 「경희」발표. H.S란 이름으로 시「광(光)」도
       발표.
3월 사립 여자 미술학교 졸업. 졸업작품은 사립미술학교의 화재로 남아 있지 안
       다.
4월 귀국함. 귀국해서 모교인 진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8월 경에 건강이 안 좋아 그만 두고 집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9월 「여자계」3호에 단편 소설 「회생한 손녀에게」발표
 
1919(23세)
 1월 21일로부터 2월 7일까지 「매일신보」에 '섣달 대목'이란 주제로 5회. '초하
      룻날'이란 주제로 4회, 모두 9점의 만평을 연재함.
3월초 서울의 신마실라(이화학당 교사), 박인덕(이화학당 교사), 신준려(이화학
       당 교사), 황에스터(黃愛施德, 호적명 황애덕,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마리아(정신여학교 출신 동경유학생)등과 이화학당 지하실에서 비밀 회
       합을 가지며 3.1운동에 여학생 참가 계획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다.
8월 4일 5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경성지방법원의 「면소 및 방면」결정으로 풀려남.
풀려 난 뒤 정신여학교 도화(미술)교사로 재직.
11월 3일 어머니 최시의 사망
 
1920(24세)
 9월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인 「공제」창간호에 판화 <조조(早朝)>를 발표했
      다.
4월「신여자」제2호에 판화 <저건이 무엇인고> 발표.
4월 10일  정동 예배당에서 김필수 목사의 주례로 김우영과 결혼했다. 나혜석과
      김우영은 이 날의 동아일보에 청첩장을 내었고 또한 같은 신문에 이들의 사
      진과 함께 결혼 소식이 보도되었다. 결혼 후 신혼 여행 대신 김우영과 함께
      전남 고흥군에 있는 최승구의 묘지에 찾아가 비석을 세우고 돌아왔다. 여
      름, 첫 딸 나열을 임신한 탓인 듯 정신여학교를 그만 두었다.
6월 김우영과의 약혼시대를 회상한 「4년 전의 일기 중에서」를 신여자 제4호
      에 발표(3월 집필). 동지에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을 그린 4장의 목판
      화를 발표했다. 임신을 했다는 초조감으로 2개월간 일본 생활. 이 시기가
      가장 알차게 공부한 보람된 시기라고 회고함.
 
1921(25세)
 1월 「폐허에 시「사(砂)」, 「냇물」발표
2월 「동아일보」에 「회화와 조선여자」발표
3월 19∼20일 임신 9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경성일보사(조선총독부의 일어판
       기관지로 한글판은  매일 신보이다) 내청각에서 유화 개인전람회를 열었다.       
이는 우리나라 서양화 전시회로서는 평양에서 열린 김관호의 전람회 다음인 두 번째,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유화 개인전이었다. 그림 70여점이 전시 되었고  높은 값에
작품들이 팔렸다.
                             「양화 전람에 대하여」(「매일신보」3.17)발표
4월  1∼3일 제1회 서화 협회전람회(協展)에도 유화를 출품했다. 「매일신보」가
      입센의 희곡을 「인형의 가(家)」란 제목으로 번역 연재하면서 제일 마지막회
      에 나혜석에게 가사를 지어줄 것을 청탁하여 4월 3일자 신문에 노래 가사 「
      인형의 가」를 발표했다. 이 가사에는 김영환이 작곡한 악보가 함께 실렸다.
4월 29일  첫 딸(나열)을 낳았다.
7월 「신가정」에 소설 「규원(閨怨)」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제2호에 계속 
연재될 예정이었으나 「신가정」 제2호가 나오지 못함으로써 미완상태다.
7월 「개벽」에 판화 <개척자>발표.
9월  김일엽의 「부인 의복 개량에 대하여 한 가지 의견을 드리나이다」에 반박하
       는 글 「김원주 형의 의견에 대하여 - 부인의복 개량문제」를 「동아일보」
       (9.21-10.1)에 발표. 9월 일본 외무성의 관리로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
       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 안동현 부영사 사택에서 살기 시작했다.
 
1922(26세)
 3월 안동현에 여자야학 설립을 주도했다.
6월 조선총독부 주최의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유채수채화 분야에 출품 <봄><농
      가>가 입선했다. 이 분야에는 입상은 없고 입선만 61명이었는데 그중 조선인
      은 나혜석 외에 고희동과 정규역이 있을 뿐이었다.
 
1923(27세)
 1월 첫딸을 나열을 임신해서 낳아 돌이 될 때까지의 심리적 육체적 변화를 솔직하
      게 기록하면서 '모성'의 신화를 부정한 「모(母)된 감상기」(「동명」
       1923.1.1-1.21)를 발표했다.
3월 백결생이 「모된 감상기」를 비판하는 「관념의 남루를 벗은 비애」를 발표
      하자 이에 반박하는 글 「백결생에게 답함」(「동명」1923.3.18)을 발표했
       다.
3월 부터 터진 의열단 사건(황옥 경부사건)에 나혜석 김우영 부부가 도움을 주었
      다는 회고가 있음.
6월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봉황성의 남문>이 4등, <봉황산>이 입선했다.
6월 부잣집 아들과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기생 강명화의 자살에 대
       한 시론 「강명화의 자살에 대하여」(「동아일보」1923.7.8)발표.
9월 고려 미술회에 발기 동인으로 참가(정규익, 박영채, 나혜석, 강진구, 백남순)
11월 「신여성」에 「부처간의 문답」발표 염상섭의 단편소설집 「견우화」에
       표지 그림 <견우화>를 그림
 
1924(28세)
 6월 제3회 조선미전에 <추의 정> 4등, <초하의 오전>이 입선했다.
7월 「만주의 여름」(「신여성」1924.7)발표. 「1년만에 본 경성의 잡감」(「개
       벽」1924.7)발표. 미전을 위해 오랜 만에 서울에 온 감상을 기록한 것임.
8월 「나를 잊지 않는 행복」(「신여성」1924.8) 발표,
이해 말엽에 첫 아들 선(宣) 낳음.
 
1926(30세)
 1월 자신의 육아 경험을 「내가 어린애 기른 경험」(「조선일보」1926.1.3)으로
       발표,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 생활 개량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음 「생활개
       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동아일보」1926.1.24-30)을 발표했다.
4월 소설 「원한(「조선문단」1926.4)발표. 여성에 대한 인습적인 생각에서 벗어
      나지 못한 구여성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이 무렵 화가로서의 재능이나 예
      술 행위의 목적 등에 대한 회의가 생기고 예술에 대한 이해가 없는 남편에 대
      한 불만도 쌓이고 있었다.
5월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天后宮)>이 특선, <지나정(支那町)>이 입
      선했다. 자신의 창작 과정을 쓴 「미전 출품 제작 중에」(「조선일보」
      1926.5.20-23)발표.
6월「내 남편은 이러하외다」(「신여성」1926.6)발표. 남편 김우영의 성격을 소
      개하는 글이다.
12월 19일 둘째 아들 진(辰)낳음.
 
1927(31세)
 봄, 만주 안동현의 살림을 정리하고 귀국, 동래 시집에서 지내며 구미 여행을 준비
     함. 일본 외무성에서는 가끔 벽지 근무자에게 위로 여행을 보내주는데 김우영
     에게도 그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의 오후>가 무감사 입선. 무감사 입선이란 전해에 특
     선한 작가에게 주는 예우이다. 「경성 온 감상의 일편」(「동아일보」
     1927.5.27)발표.
6월19일 부산을 출발하여 구미 여행길에 오름. 나열, 선, 진의 세 아이는 칠순의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남편 김우영을 따라 나선 길이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7월 파리에 도착했다. 김우영은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가고
     나혜석은 파리에서 야수파의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했다.
10월 최린이 파리에 와서 한국유학생들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처음 최린을 만났
     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은 천도교 도령(道領)
      으로 1926년에 구미 여행길에 나서 미국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 것이었다. 나
      혜석은 최린과 함께 파리관광을 하였다.
 
1928(32세)
 7월 영국을 관광하고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가했던 여성으로부터 영어를 배
     우면서 여성 참정권 운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9월 17일 미국을 향해 파리를 떠났다. 파리의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하면서 나혜석의 그림은 야수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유럽여행중의 소산으
      로 <스페인 국경>, <스페인 해수욕장>, <무희>, <파리 풍경>, <나부>등의
      유화가 남아 있다.
 
1929(33세)
 2월 1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을 떠나 하와이를 거쳐 17일 만인 3월 3일에 요코
      하마항 도착. 1주일 정도 도쿄에 머무른 뒤
3월 12일. 부산에 도착함. 동래 시댁에서 살게 되었다. 김우영은 무직자로 변호사
 개업준비를 하느라고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6월 20일 셋째 아들 건(健)을 낳았다. 혁명과 건설의 도시 파리의 산물임을 기념
      하여 이름을 '건'으로 지었다고 한다.
8월 「별건곤」에 기자 차상찬이 쓴 탐방 기사 「구미를 만유하고 온 여류화가 나
      혜석 씨와의 문답기」가 실렸다.
9월 23-24일 이틀간 수원성 내 남수리 불교 포교당에서 '구미사생화 전람회'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구미 여행중 그린 그림과 수집한 그림(복제품)을      
함께 전시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수원 지국 주최, 중외일보 수원지국 후원
 
1930(34세)
 1월 김우영은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으나 경제적으로 곤궁했고 파리에서 
있었던 나혜석과 최린의 연애에 관한 소문이 조선 사교계에 퍼져 나가면서
      나혜석과 김우영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3월말 구미 여행담을 쓴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동아일보」
      3.28-4.2)발표. 이후 수 차례 나혜석은 구미 여행기를 쓴다.
4월 「구미시찰기」(「동아일보」1930.4.3-4.10)발표.
6월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딸 나열이 갓난 아들 건을 업은 그림<아이들>과 파
      리의 풍경을 그린 <화가촌>이 입선했다.
6월 인터뷰 「우애결혼, 시험결혼」(「삼천리」1930.6)에서 이혼의 비극을 예방
      하기 위해 시험결혼이 필요하며, 시험결혼기간 동안에는 산아제한이 필요하
       다는 조선의 인습을 뛰어넘는 발언을 하고 있다.
7월 「파리에서 본 것, 느낀 것」(「대조」1930.6.7합병호)발표
9월 「젊은 부부」(「대조」1930.9)발표 이 무렵 김우영은 서울에서 이미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리고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결국 나혜석은 이혼서류
       에 도장을 찍었다. 그 뒤 나혜석은 만주 봉천에서 살고 있는 오빠 나경석에
       게 가서 잠시 머물렀다.
11월20일 김우영은 이혼신고서를 부청에 제출, 이혼이 성립되었다.
 
1931(35세)
 2월 김우영은 변호사 일이 잘 되지 않아 일본인 친구(宇桓 총독의 비서관)의 도움
      으로 다시 일제의 관료로 들어갔다. 전라남도 이사관이 되어 전남광주로 갔
      다. 이후 1940년까지 김우영은 광주에 살면서 산업부의 산업과장, 상공과장, 
수산과장, 농촌진흥과장을 지냈다.
5월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정원>이 특선, <작약>과 <나부>가 입선했다. <
      정원>특선 소식은 이혼 후의 나혜석에게 큰 기쁨과 힘이 되었다.
여름, 선전 특선에 용기를 얻어 일본 문부성이 주최하는 '제국미술원전람회'에 도
       전할 생각으로 여름 1달동안 금강산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다.
10월 일본 제12회 제전(帝展)에 <금강산 삼선암>과 <정원>을 출품, <정원>이 입
       선했다.
11월, 도쿄에 있으면서 제전 입선 후의 소감인 「나를 잊지 않는 행복」(「삼천리
         」1931.11)을 발표했다. 이미 한번 발표했던 글이나, 이혼 후 전업화가로
        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덧붙이고 있다.
 
1932(36세)
 1월,「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삼천리」1932.1)발표.
4월 일본에서 돌아와 잠시 중앙보육원에서 미술 교사로 근무함. 「파리의 모델과
       화가 생활」발표(「삼천리」1932.3-4)
6월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소녀>, <금강산 만상정>, <창가에서>가 무감사
       입선되었다. 그러나 이미 조선 미전 특선, 제전 입선의 경력을 가진 나혜석
      으로서는 그리 영광스러운 일은 아니었고 나혜석의 그림에 대한 평도 그리
      좋지 못했다. 나혜석 또한 미전 제도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글을 썼다.
7월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 총평」(「삼천리」1932.7)「앙데팡당 식이다 - 혼
       미 저조의 조신미술전람회를 비판함」(「동광」1932.7)을 발표했다.
여름, 다시 금강산 해금강에서 가을의 제13회 제국미술원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림을 3,40점 그렸는데 머무르고 있던 집에 불이나 10여점밖에 건지지 못
        해 애통해하고 이때의 충격으로 몸도 아프게 되었다.
12월부터 1934년 9월까지 「삼천리」지에 9번에 걸쳐 구미 여행의 기행문 「구
       미 유기」를 연재했다.
 
1933(37세)
 1월 분주했던 결혼 생활을 회상한 「화가로 어머니의 나의 10년간 생활」(「신동
      아」1933.1)발표. 구미 여행시 베를린에서 맞았던 정월 풍속을 소개하는 글
    「베를린의 그 새벽」(「신가정」1933.1)발표.
2월 4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146의 15호에 '여자미술학사'를 열었다. 이혼과 화재
       의 심적 타격으로 수전증이 생겨 왼팔의 부자유를 느끼면서도 미술 개인 지
       도를 하는 한편 주문을 받아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모델」(「조선
       일보」1933.2.28)을 발표.
4월 죽은 지 17년이 된 애인 최승구를 추모하는 글 「원망스런 봄밤」(「신동아
       」1933.4)을 발표.
5월 「파리의 어머니 날」(「신가정」1933.5)발표.
5월의 제1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2점 출품할 예정이라고 했는데, 출품을
      하지 않았는지 입선하지 못했는지 입선자 명단에 나헤석의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이후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나혜석의 그림을 볼 수 없게 된다. 대신 선
       전에 대한 평인 「미전의 인상」(「매일신보」1933.5.16-5.21)을 썼다.
10월 「연필로 쓴 편지」(「신동아」1933.10)을 발표. 도쿄 유학시절 일본인 화
        가 사또가 자기를 연모하면서 일어났던 사건을 회상하여 쓴 것임.
12월 자전적 장편소설 '김영애'를 써서 이광수에게 보이려고 발표를 주선해 줄 것
        을 부탁했다고 하나 발표되지는 않은 것 같다. 개성 <선죽교>를 그림.
 
1934(38세)
 1월 4일 「조선중앙일보」현상 공모 '우스운 이야기'부문에 「떡 먹은 이야기」
       가 당선되었다. 상금은 2원이었다.
2월 「밤거리의 축하식 - 외국의 정월」(「중아」1934.2)를 발표, 「베를린의 그 새벽」
과 유사한 내용이다.
3월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 - 구미 부인의 가정 생활」(「중앙」
        1934.5)발표. 수원에서 삼일 여학교를 다니던 시절 삼일학교를 다녔던 남학
        생에 얽힌 추억담이다.
7월 「여인 독거기」(「삼천리」1934.7)발표.
8월 1932년 여름 총석정 해변에서 만난 구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총석정 해변」
       (「월간 매신」1934. 8)을 발표했다.
8-9월 「이혼 고백장」(「삼천리」1934.8-9)을 발표했다. 김우영을 만나서 연애
       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생활과 심경을 솔직하게 쓰고, 여
       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관념을 비판화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논란
       을 불러 일으켰다.
9월19일 변호사 소완규를 통해 최린에게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 12,000원을 청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이 사실이 9월 20일자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최린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의 기사는 삭제되었고, 나혜석은 소
        송 취하조건으로 최린으로 부터 수천원을 받았다고 한다.
 
1935(39세)
 2월 「신생활에 들면서(「삼천리」1935.2)를 발표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얽
       혀 있는 조선을 떠나 미래를 향해 다시 파리로 가고 싶다는 희망과 의지를 담
       은 글이며, 이혼 후 자신이 겪은 조선 사회의 인심을 비판하면서 인습에 얽
       매인 정조관념의 해체라는 한 시대를 앞선 주장을 했다.
3월 시「아껴 무엇하리 청춘을」발표 (「삼천리」1935. 3) 이해 봄, 수원 서호 근
       처에 집을 마련하고 약을 먹고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파리에 가고 싶다고
       하던 나헤석이 파리에 가지 못하고 수원에 거처를 마련한 이유는 경제사정
       등 여건의 불비함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몇 년 간 아이들을 보지 않고 살
       수는 없어서 였다.
6월 「삼천리」에 「구미여성을 보고 반도 여성에게」와 「이성간의 우정론-아
       름다운 남매의 기」발표.
7월 「나의 여교원 시대」발표. 10월 「독신여성의 정조론」(「삼천리」
       1935.10)발표.
10월 24일 서울 진고개(지금의 충무로)의 조선관 전시장에서 '소품전'을 개최.
       200여점을 전시했으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첫 아들 선, 폐렴으로 열 두 살의
 나이로 요절.
11월 희곡 「파리의 그 여자」(「삼천리」1935.11)발표. 구미여행 당시 있었던
       일과 조선에 와서 다시 최린을 만났던 일을 소재로 한 희곡이다.
 
1936(40세)
 1월 「영미 부인 참정권 운동자 회견기」(「삼천리」1936.1)
4월 「런던 구세군 탁아소를 심방하고」(「삼천리」1936. 4)「프랑스 가정은 얼
       마나 다를까」(「삼천리」1936. 4)
12월 소설 「현숙」발표 이혼 후 이 무렵까지 그린 것으로 <수원 서호> <인천풍
       경> <별장> <화령전작약> 등의 그림이 남아 있다.
 
1937(41세)
 5월「나의 도쿄 여자 미술학교 시대」(「삼천리」1937.5)를 발표.
10월 소설「어머니와 딸」(삼천리)을 발표했다. 이혼 후 하숙하고 있던 집에서의
       경험을 소재로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하숙집 주인 여자가 딸을 시집 보내려
하나 신식 공부한 딸이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아 일어나는 갈등을 그린 소설
       이다. 이해 언젠가 시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동래로 달려갔으나 김우영의 완
       강한 거부로 상청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이해 말, 김일엽을 찾아서 수
       덕사 견성암으로 갔다. 1943년까지 주로 수덕사 밑의 수덕 여관에 몸붙여 있
       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1946년 행려병자로 불우한 삶을 마쳤다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비난에 맞닥뜨리게 되면서여성
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런 관념은
상대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쳤다.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자기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이혼을
당하고 빈몸으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한 여성을 파멸로 몰아 넣은 두 남자와
 그들 남성이 멀쩡하게 행사하도록 하는 사회 관습에 도전한 나혜석이 연 전람회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응은 차가웠고, 사회의 냉대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화재로 그림을 태워 먹고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절집들을 떠돌아 다녔고, 해방 후에는 서울의 한 양로원에 맡겨졌으나 그는 걸핏하면
 몰래 빠져 나왔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면
 늘 기운이 솟아오른다고 했던 나혜석은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온몸으로 살아간 화가이며
 민족주의자이고 여성해방론자였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
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에게도 인간적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어
 해체하는 글들을 써서 사회의 비난을 자초하면서도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
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
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출처 : 웹검색,Actual entity님의 블로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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